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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들은 왜 구호를 좋아할까?

퇴준생 정소장

2022.07.0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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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고객’을 외치지만 정말 ‘고객’을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그들에겐 회사 이익과 성과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죠.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올리고 선창하면 분명 전기가 오를 거예요.” 

월요일을 알리는 우렁찬 소리가 M의 귓가를 때린다. 회의실 상석에 앉은 대표는 주간 회의 시작 전 항상 구호를 외친다. 대표가 “구호 준비”라고 하면 팀장들은 “야”라고 기합을 넣는다. “고객이 우선”이란 대표의 힘찬 선창과 “우리는 최선”이라는 팀장들의 후창으로 회의가 시작된다. 사무실에 앉아있는 M은 팀장과 대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잠깐의 휴식을 가진다. 

 

 “회의가 끝날 때 또 구호를 해요. 대표가 “된다 된다”하면 팀장들은 “더 잘 된다”라고 외치고 박수를 세 번 치죠. 가끔 박수가 안 맞거나 목소리가 작으면 대표는 구호를 다시 하자고 해요. 회의실 밖에서 들으면 엄청 웃겨요.”

 

 

 

회의가 끝나고 걸어 나오는 대표의 표정은 밝지만 뒤따르는 팀장들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매번 하는 구호지만 다들 적응이 안 되는 듯했다. 시뻘건 팀장의 얼굴을 본 M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도망칠 때도 있었다. 팀원들 앞에선 위엄 있는 팀장이 대표 앞에서 주먹을 쥔 채 구호를 외치는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대표가 바뀌면 구호도 달라져요. 이전 대표는 ‘고객 행복, 나의 행복’이었나 그랬어요. 그때는 구호 외치고 ‘파이팅’까지 덧붙였죠. 옆 자리 사람들과 하이파이브까지 했어요. 도대체 어디서 배워오는 걸까요?”

 

비대면 회의에도 대표의 구호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대표는 대표실에서, 팀장들은 각자 자리에서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M은 대표실과 가까운 부서에 업무 요청을 하러 찾아갔는데 마침 회의가 끝나는 시점이었다. 업무 조율을 하던 중 갑자기 대표실에서 표효 소리가 들렸다. M은 깜짝 놀라 소리 난 곳을 쳐다보았다. 카메라를 집어삼킬 듯 한 눈빛으로 “된다 된다” 외치는 대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각자 자리에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더 잘 된다”라고 속삭이는 팀장들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대표 별명이 뭔 줄 아세요? ‘구성애’에요. 구호 성애자의 줄임말이죠. 회의뿐만 아니라 단체 사진 찍을 때도 마지막 포즈는 구호를 외치면서 해요. 꼭 대표가 선창을 하는데 그래야 직성이 풀리나 봐요. 회사에서 구호하는 건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 있는 곳에서는 너무 화끈거려요. 특히 회식자리에서요.”

 

 

 

거나하게 취한 대표는 건배사를 위해 앞으로 나갔다. 모두 잔을 채우라는 말에 일사불란하게 서로의 잔을 채웠다. 술기운에 기분이 달아오른 대표는 많은 말을 쏟아냈다. M은 팔이 아팠지만 티 내지 않고 대표의 연설을 귀담아듣는 척했다. 길었던 말이 끝나고 사람들과 술잔을 맞댔다. 역시나 대표의 건배사는 회사 구호였다. 평소보다 더 큰 선창으로 식당을 뒤덮었다. M은 가슴이 웅장해 지기는커녕 테이블 밑으로 숨고 싶었다.

 

“대표가 외치겠다는데 제가 감히 어쩌겠어요. 그런데요. 구호 내용이 정말 와 닿지 않아요. 대표마다 ‘고객’, ‘고객을 위하는’ 이런 말을 넣어요. 항상 ‘고객’을 외치지만 정말 ‘고객’을 생각한 적은 없거든요. 그들에겐 회사 이익과 성과 달성을 위한 수단일 뿐이죠. 거짓말 탐지기에 손을 올리고 선창하면 분명 전기가 오를 거예요. 지킬 생각도 없는 구호를 자꾸만 소리치니 반감만 생기네요. 전 양심상 매번 립싱크했어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외침이지만 대표들은 매번 고집했다. "성과급을 받자"라던가 "보너스를 위하여"라면 더 와 닿았을 것이다. 직원들은 부끄러워하고 대내외를 향한 보여주기 식 구호는 직원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매번 울려 퍼졌다. 도대체 대표는 왜 구호에 집착하는 걸까?

 

“권력을 느끼는 순간이 아닐까요? 본인의 한 마디에 모든 사람이 집중하고 따르잖아요. ‘내가 너희를 호령한다’ 이런 느낌일 거라 생각해요. 회사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자주 외치는 것 같아요.”

 

 

M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네요. 영화를 보면 리더들이 큰 일을 앞두고 한 마디씩 하잖아요. 캡틴 아메리카는 “어벤저스 어셈블”, 블랙 펜서는 “와칸다 포에버”라고요. 희열이 있나 봐요. 그런데 전 구호를 시켜도 못 할 것 같아요. 대표가 아니라서 그런 거겠죠?”

 

대표의 큰 뜻을 일개 직원 나부랭이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직원들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면 백번을 외쳐도 박수받을만하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과 위치을 확인하기 위해 자행되는 구호는 괴롭힘이라 생각한다. 정말 고객을 생각하고 위한다면 외침에 그치지 않고 진심이 담긴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M이 다니는 회사 홈페이지엔 다 같이 구호를 외치는 사진이 메인을 차지하고 있다. 선창은 역시나 대표가 했다.

 

“구호가 안 맞다고 몇 번을 다시 찍은 사진이죠. 구호가 안 맞으면 업무 합도 안 맞는다고 말하던 대표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깟 외침이 뭐 길래 입에 달고 사는 걸까요? 구호 말고 직원을 뭉치게 하는 방법과 자신의 자리를 증명할 방법을 먼저 외쳐줬으면 좋겠네요. 허울뿐인 '고객' 구호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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