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당일에도 현장 접수가 가능했던 마라톤 대회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이제 러닝은 단순한 건강관리를 넘어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달리기라니, 뭐 별거 있겠어?’라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바꿀 시간이다.
전 세계적 러닝 열풍이다. 2024년 시카고 마라톤 대회는 사상 최대 규모인 약 5만 명의 참가자 수를 기록했으며 2025년 런던 마라톤 대회의 참가 신청자 수는 90만 명을 내다보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약 500만 명의 러닝 인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은 혼자서 또는 달리기 팀인 러닝 크루Running Crew와 함께 달리기를 즐기고 있다. 특히 러닝 크루 문화와 소셜 미디어에서의 ‘런스타그램’, ‘오운완’ 유행과 맞물려 러닝의 대중화는 점점 더 가속화 되고 있다.
러닝의 이유 있는 열풍
요즘 한강은 물론이고 공원이나 동네 산책로, 하천 등지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달리기하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늘어났을까? ‘즐겁게 건강을 관리하자’는 의미의 ‘헬시 플레저Healthy Pleasure’ 트렌드는 달리기와 부합한다. 바쁜 생활 속에서 달리기는 신체 건강뿐 아니라, 자존감 회복을 돕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기록을 세우는 경쟁이 아닌, 자신과의 시간을 갖고 스스로를 돌보는 ‘건강한 놀이’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는 MZ 세대에게 달리기는 복잡한 절차나 장비 없이 언제든 시작할 수 있어 더욱 인기다.
나에게 꼭 필요한 제품만 소비하는 트렌드에 맞게 달리기는 가성비 높은 취미로 주목받고 있다. 산책 위주의 걷기 운동이나 헬스장을 주로 찾던 중·장년층 역시 러닝에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도심을 달리는 러닝 크루보다 마라톤 중 하프코스나 풀코스에 도전하는 이들 중 40대 이상 중·장년층 비중이 5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셀럽들의 달리기도 러닝 열풍에 영향을 주고 있다. 웹툰 작가 기안84의 마라톤 풀코스 도전기는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나도 할 수 있다’는 도전 정신을 불러 일으켰고, 달리기를 하면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가수 션의 ‘815 기부런’은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성취감을 심어주었다.
고통 없는 ‘FUN RUN’을 즐기다
과거에는 달리기가 고통스러운 이미지였다면, 요즘은 그저 뛰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펀런Fun Run이 대세다. 기록에 목숨 걸지 않고 천천히 뛰면서 자연을 즐기거나, 음악에 몸을 맡기며 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형형색색의 파우더를 맞으며 즐기는 ‘컬러런Color Run’이나 빵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달리는 ‘빵빵런’처럼 축제같이 즐길 수 있는 이색 마라톤도 많아졌다. 건강하고 즐겁게 달리기 위한 러닝 아카데미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달리기는 비단 젊은 세대만의 유행이 아니다. 건강을 유지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달리기를 선택하는 중·장년 세대도 늘고 있다. 평생교육원과 지역 도서관도 4060 대상의 건강 프로그램으로 달리기를 수업으로 편성하는 곳이 많아졌다.
트렌드와 마케팅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최근 몇 년간 달리기는 더 다양한 문화와 결합하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고 있다. 그중 ‘런트립Run Trip’은 달리면서 여행지의 문화를 경험하는 신개념 여행법이다. 여행지를 달리며 새로운 도시를 탐험하는 런트립은 상품으로 확장되었다. 여행사는 셀럽과 함께하는 마라톤 트립 패키지 상품을 출시하기도 하고, 지역 마라톤 대회에서는 마라톤 전야제로 지역 관광지를 달리는 런트립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달리기와 마음의 평화를 함께 찾는 ‘명상런’도 인기를 끌고 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달리기와 명상이지만 동적 명상을 통해 내면의 소리를 더욱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셈이다. 유아차에 아이와 함께 달리는 ‘유아차 러닝’도 한국에 등장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이 문화는 자녀와 함께하는 경험을 중시하는 건강한 라이프스타일로 부모들에게 각광받고 있다.
러닝이 인기를 끌자 관련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요즘은 러닝화가 리셀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데, 특히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브랜드가 온러닝On Running이다. 스위스 브랜드인 온러닝은 부상을 예방하기 위해 클라우드 테크놀로지 기술로 만들어진 러닝화로 편안함과 기능성을 강조했다. 브랜드의 철학 역시 단순한 달리기가 아닌 웰빙과 균형 잡힌 삶을 중시한다. 웰빙 트렌드에 걸맞은 브랜드가 또 있다. 캐나다의 룰루레몬Lululemon은 원래 요가복 브랜드로 시작했으나, 이제는 커뮤니티 중심으로 달리기와 웰빙을 결합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1 러닝족뿐 아니라 패션 산업에서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스위스 스포츠 브랜드 ‘온러닝’ ©On
2 비포장도로, 산길, 초원 등을 자유롭게 달리는 ‘트레일 러닝족’이 늘고 있다.
스포츠 분야 외의 기업들은 어떨까? 기업들도 시대의 흐름에 탑승하여 러닝을 활용한 마케팅 활동에 적극 나서고 있다. 우아한형제들의 ‘장보기 오픈런’은 그야말로 적중했다. B마트 홍보를 위해 장바구니에 원하는 물건을 담아 들고 완주하기만 하면 그대로 다 주는 러닝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1분 만에 완판되었다. 한화생명의 63런 또한 러닝을 통해 소비자와의 접점을 넓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달리기를 이용한 소비 트렌드와 마케팅 행사들은 이제 단순한 운동을 넘어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최근 다양한 형태의 달리기 문화가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세계의 마라톤 문화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한국은 대중화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자연이 어우러진 한국 특유의 도시 환경은 러닝을 위한 최적의 공간을 제공한다. 각종 러닝 대회에 외국인의 참여도 눈에 띄게 늘었다. 자극적이고 휘발성 강한 문화를 소비하는 대신 건강과 웰빙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인해 달리기 문화는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인적 성취뿐만 아니라 공동체와의 연결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달리기를 통해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커뮤니티 러닝의 가능성이 무한하다. 이미 많은 해외 러너를 유입하는 인바운드 마라톤 여행, 산을 달리는 트레일 러닝Trail Running, 키즈런Kids Run, 유아차 러닝과 같은 새로운 트렌드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달리기는 단순한 운동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갈 전망이다.
처음부터 피니시 라인Finish Line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꼭 마라톤이 아니어도 좋다. 달리는 것만으로도 계속 뛰다 보면 언젠가 러너들만 느낄 수 있는 나만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글. 안정은(런더풀 대표)